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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 사이 | Rosso&Blu 개정판
글 : 에쿠니 가오리, 츠지 히토나리 / 옮긴이 : 김난주, 양억관
출판사명 : 소담
도서분류 : 소담출판사 > 소설
발행일/ISBN/판형/분량: 2015-11-25 / 89-7381-119-9-04830 / 128*187 / 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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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러브스토리 『냉정과 열정 사이』 15년 만의 개정판 출간

한국인들에게 꾸준히 사랑받아온 문학 스테디셀러 『냉정과 열정 사이 Rosso&Blu』의 개정판이 2015년 11월 출간되었다. 지난 2000년 11월 초판이 출간되었으니 꼭 15년 만이다. 이 책은 출간과 동시에 수많은 독자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단숨에 베스트셀러 자리에 올랐고, 현재 판매 부수는 백만 부를 훌쩍 넘었다. 독특한 집필 방식도 화제였다. 작가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히토나리가 각각 여자와 남자의 이야기를 맡아, 한 회씩 번갈아 2년간 잡지에 연재한 것을 책으로 묶은 것이다. 헤어진 연인을 가슴에 담아둔 채 각자의 삶을 사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쓰는 동안, 두 작가는 실제로 연애하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두 개의 이야기면서 하나의 이야기이기도 한 이 특별한 소설의 한국어판 번역은 김난주, 양억관 부부 번역가가 맡았다. 두 번역가는 헤어졌지만 서로를 그리워하는 연인의 미묘한 심정을 섬세하게 번역해냈다.
이 책으로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던 에쿠니 가오리는 이제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가장 친숙한 일본 여성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아쿠타가와상, 페미나상 등을 수상한 뛰어난 작가이자 영화감독이기도 한 츠지 히토나리도 한국 작가 공지영과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을 함께 쓰고 국내 영화제에 참석하는 등, 한국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지구가 멸망하지 않은 한, 영원히 반복될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야기

대학에서 만나 연인이 된 아오이와 쥰세이는 안타까운 오해로 헤어져 각자의 삶을 살게 된다. 둘은 가장 행복했던 시절에 흘리듯 맺은 ‘아오이의 서른 살 생일에 피렌체 두오모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가슴에 새긴 채 살아간다. 각자의 옆에는 새로운 연인이 있지만 마음을 꽉 채우기에는 역부족이다. 헤어진 지 8년, 여전히 서로를 잊지 못한 두 남녀는 결국 모든 일을 제쳐두고 피렌체로 달려간다. 시종일관 평행선을 그리던 두 이야기는 이 지점에 이르러 한 점으로 모인다. 그리고 두 이야기를 모두 읽은 독자는 평행선이라고 생각했던 두 개의 삶이 사실 지그재그로 몇 번이고 서로 교차했음을 알게 된다.
혹자는 청승맞다거나 미련스럽다고 여길 법한 소설 속 두 남녀의 모습은, ‘연애의 종말’을 맞아본 사람에게는 눈물 날 만큼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로소Rosso’ 혹은 ‘블루Blu’ 한 권만 읽어도 좋지만 두 권을 연달아 읽거나 연재된 순서대로 한 장(章)씩 번갈아 읽으면 더욱 좋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출간된 지 15년이 지난 지금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모든 남자와 여자들에게 여전히 따스한 위안과 희망을 안겨준다. 영화와 영화음악으로도 널리 알려져 이제는 하나의 이미지로 우리의 가슴에 남은 『냉정과 열정 사이 Rosso&Blu』. 세대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공감을 얻어낸 이 책은 우리 시대 연애소설의 새로운 클래식이다.
이번 개정판은, 15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에 맞춰 기존 문장을 다듬고 오역을 바로잡았다. 새롭게 바뀐 표지 또한 한층 신선함을 더한다. 개정판 표지에는 작품 속 중요한 장소인 피렌체 두오모 성당의 실루엣을 모티프로, 해가 떠오르고 저무는 찰나를 담아냈다. 제목 그대로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가는 주인공들의 알 수 없는 감정처럼 아스라한 빛깔이다.


▮ 줄거리

Rosso

“사람의 있을 곳이란, 누군가의 가슴속밖에 없는 것이란다.”

저녁나절이면 기우는 햇살을 받으며 욕조에 목욕물을 받는 여자가 있다. 한적한 시간이면 엷은 칵테일을 마시며 책을 읽는 여자. 푸근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있고,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목욕물 앞에서 어깨를 주물러주는 애인의 손길은 듬직하기만 하다. 그러나 마음속 깊이 봉인된 젊은 시절 온 마음을 바쳐 사랑했던 사람과의 옛추억은 그녀를 어떤 가슴에도 안식할 수 없게 한다.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마음을 붙이지 못하는 고독한 여자. 서로를 온전히 사랑하고 이해했던 8년 전 연인과의 과거를 자꾸만 들여다보게 되는 여자. 과거를 밀어내고 조용한 일상에 묻혀보려는 여자, 아오이의 이야기.


Blu

“나는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탈리아의 고도(古都) 피렌체에서 과거와 미래를 잇는 고미술품 복원사로 일하는 남자. 새끼고양이처럼 발랄하고 매력적인 연인과 보내는 시간에도 문득문득 과거의 연인을 생각하는 남자. 결코 잊을 수 없는 옛 연인과 가장 행복하던 시절 흘리듯 맺은 단 하나의 약속을 곱씹으며 과거에 한쪽 발을 담근 채 살아간다.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만나기로 한 옛 연인의 서른 번째 생일을 향해 지난한 세월을 돌고 돌아온 남자, 쥰세이의 이야기.



▮ 책 속으로


Rosso

나는 일어나, 잠든 마빈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단단한 턱, 짧게 돋아 있는 수염, 긴 속눈썹,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마빈, 지금, 내 눈앞에 있고, 나를 꼭 껴안아주는 마빈. 잠자는 마빈의 몸에 다리를 휘감고, 움푹한 어깨에 얼굴을 부빈다. 마빈의 체온, 마빈의 냄새. 마빈은 사람의 마음속까지 파헤치고 들어오거나 모든 것을 알려 들지 않는다. 혼자서 점점 상처받아 흥분한 두더지처럼 몸을 사리지도 않는다. 이 세상이 다 끝난 것처럼 슬픈 얼굴로 내게 말없는 비난을 하지도 않는다. 비는 내게 도쿄를 생각나게 한다. _pp.32~33

“아오이 씨는 이렇다 하게 하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아, 물론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는 하지만 경력이 될 만한 일은 아니지. 논다고 해봐야 다니엘라만 만나는 정도잖아?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데도 미국인 모임에는 얼굴도 내밀지 않고, 그렇다고 일본 사람들과 사귀는 것 같지도 않고. 늘 책과 목욕뿐.”이라고 말했다. 목욕뿐, 이란 말에서 슬쩍 웃었다.
게을러서 그래요, 라고 대답했지만, 안젤라는 승복할 수 없다는 투였다. “결혼은 안 해?”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한다. “결혼요?” “그래. 사랑하고 있잖아? 마빈을.” 나는 안젤라의 얼굴을 보았다. 갈색 머리를 돼지 꼬리처럼 묶고, 여전히 부실부실 튀어나와 있는 잔머리에 화장기는 없다. 군청색 레인코트에는 온통 빗방울이 맺혀 있다. _p.66

나는 쥰세이의 얘기를 듣는 게 좋았다. 강변길에서, 기념 강당 앞 돌계단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도중에 있는 찻집에서, 우리들의 방에서. 쥰세이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누구에게든, 당황하리만큼 열정을 기울여 얘기했다. 항상 상대방을 이해시키려 했고, 그 이상으로 이해받고 싶어 했다. 그리고, 얘기를 너무 많이 했다 싶으면 갑자기 입을 꾹 다물어버리곤 했다. 말로는 다 할 수 없다는 듯, 그리고 느닷없이 나를 꼭 껴안곤 했다. 나는 쥰세이를, 헤어진 쌍둥이를 사랑하듯 사랑했다. 아무런 분별 없이. _p.93

“제발 어디 멀리 가지 말아줘.” 우람한 팔에 더욱 힘을 주고 그렇게 말하는 마빈의 목소리가 조용하지만 감정적이고 몹시 불안하게 들렸다. 어디 멀리, 란 말이 안젤라와의 여행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마빈이나 나나. “놔요.” 가능한 한 가볍게 말했다. 마빈은 두려워하고 있다. 나는 그런 마빈이 견딜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를 안심시켜줄 수가 없다. 아무 데도 안 가니까 안심하라고, 늘 당신 곁에 있을 테니까 걱정 말라고, 나는 마빈에게 말해줄 수가 없다. _pp.109~110

“아오이.” 페데리카의 방은 기묘하다. 방 전체가 페데리카 같다. “네?” 담배를 낀 손가락에, 오늘도 남편에게 선물 받은 묘안석 반지를 끼고 있다. “사람의 있을 곳이란, 누군가의 가슴속밖에 없는 것이란다.” 페데리카는 내 얼굴도 보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거의 혼자 중얼거리듯. _pp.196~197

— 피렌체의 두오모? 왜 하필이면? 밀라노의 두오모는 안 돼?
쥰세이는 이상하다는 표정이었다. 내내, 쥰세이와 함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인생은 다른 곳에서 시작됐지만, 반드시 같은 장소에서 끝날 것이라고. 만나고 말았다, 고 생각했다. 교외의 조그만 대학에서, 도쿄란 불가사의한 도시에서. 영원히, 쥰세이와 함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헤어질 수 없다고.
— 아오이.
쥰세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면, 나는 그만큼 행복으로 충만할 수 있었다.
— 사랑해. 고통스러울 정도로.
젊고 진지한 눈길로, 조용히 그렇게 말한 쥰세이. _pp.210~211

아무런 주저도 없었다. 그때 이미 마음이 정해져 있었다. 알베르토의 공방에서, 아침 햇살 속에서, 나는 그저 인정하기만 하면 되었다. 피렌체에 간다는 것을. 두오모에 오른다는 것을. 쥰세이와 나눈 약속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는 것을. 발차 벨이 울리고, 문이 닫혔다. 몹시 흥분해 있었지만, 동시에 아주 담담했다. 나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을 이해하고 있었다. 전에 없이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감정이, 해방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세 시간 후, 기차는 피렌체에 도착했다. 약간 희미해진 햇살이, 그 때문에 한층 더 초여름 눈부신 빛으로 사방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역 앞 광장으로 나와,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와본 후로 처음인 도시의 공기를 마셨다. 피렌체. 도시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인, 아담하고 아름다운 도시. 그래서 관광업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을 걸머진 도시. 밀라노에서 불과 세 시간 거리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만큼, 전혀 분위기가 다른 도시다.
— 오고 말았어. _p.222



Blu

인간이란 잊으려 하면 할수록 잊지 못하는 동물이다. 망각에는 특별한 노력 따위는 필요도 없는 것이다. 끝도 없이 밀려오는 새로운 일들 따윈, 거의 모두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잊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게 보통이다. 어느 때 문득,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떠올리기도 하지만 그걸 또 머릿속에 새겨두지 않으니, 기억이란 덧없는 아지랑이의 날개처럼 햇살 아래 녹아내려 영원히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오 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잊으려 하면 할수록 아오이는 기억 속에서, 이를테면 횡단보도를 건너갈 때, 지각하지 않으려고 마구 달릴 때, 심할 경우는 메미를 바라보고 있을 때, 망령처럼 불쑥 모습을 드러내 나를 당혹스럽게 한다. _pp.11~12

꿈속에서 내 품에 안겨 잠든 사람은 아오이였다. 낮에는 말짱한 정신으로 살아가다가, 밤만 되면 무서운 꿈을 꾸고 몇 번이나 잠에서 깨어나 어린애처럼 가슴에 안겨온다. 왜 그러니, 하고 묻자, 무서운 꿈을 꿨어, 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어, 하고 말했다. 다들 죽어가, 아는 사람이 갑자기 변했어, 나를 모른대, 쥰세이가 죽었어, 다른 사람이 내게 전해줬어. 그녀는 꿈을 떠올리며 울고 있었다. 결의에 가득 찬 낮의 표정과는 정반대로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오이는 지금도 그런 무서운 꿈을 꾸고 누군가 곁에 있는 사람의 품에 안기는 것일까. 그녀를 안는 사람이 부러웠다. 한밤중에 그녀에게 넉넉한 가슴을 빌려줄 수 있는 남자가 얼마나 행복한지, 당시의 나는 몰랐다. 내 가슴에 달라붙는 메미의 촉감에 현실로 돌아왔다. 그녀의 달콤한 몸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지금 여기가 밀라노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메미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조용히 안아주었다. 쥰세이, 하고 메미는 잠꼬대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_pp.80~81

“올라가보고 싶어, 저 위로.” 갑자기 메미가 그렇게 말했다. 내 귀 저 안쪽에서 바람이 불어가는 것 같았다. “올라가도 될까?” “당연하지. 피렌체의 두오모도 위로 올라갈 수 있잖아.” 나는, 응, 하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갑자기 아오이와의 약속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때로 기억을 떠올리면서도 어린 시절의 부끄러운 실수라도 되듯이 기억 속에 밀폐시켜두고 싶었던 오랜 약속. 그때 우리 둘은 먼 옛날 유년 시절을 보냈던 이 밀라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가 여기저기로 퍼져나갔는데, 그날 아오이는 드물게도 열정적인 어조로 이야기하다, 엉뚱한 약속을 하는 것이었다. 농담 반으로, 또는 이야기의 흐름에 그냥 몸을 맡겨버린 듯이. _pp.92~93

다음 날부터, 나는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밖에도 나가지 않고, 온종일 아오이가 전화를 걸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메미도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주먹을 날린 아버지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할아버지는 건강을 찾았을까……. 시간만이 더 차갑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보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편지를 보내고서 이윽고 해방되었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고통스럽지 않은가. 집을 나간 메미도 마음에 걸렸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으로 뒤얽혀, 나를 바닥없는 늪 속으로 빠뜨리는 것 같았다. _pp.162~163

과거밖에 없는 인생도 있다. 잊을 수 없는 시간만을 소중히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것이 서글픈 일이라고만은 생각지 않는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뒤쫓는 인생이라고 쓸데없는 인생은 아니다. 다들 미래만을 소리 높여 외치지만, 나는 과거를 그냥 물처럼 흘려보낼 수 없다. 그래서, 그날이 그리워, 라는 애절한 멜로디의 일본 팝송을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것이다. _pp.194~195

옷을 갈아입고, 해도 뜨기 전에 밖으로 나왔다. 안개 낀 골목길에서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한 걸음, 한 걸음 확인하듯이 걸었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큰길로 나서자, 안개도 사라지고, 눈앞에 두오모의 둥근 지붕이 나타났다. 이 거리 사람들은 몇 세대 전부터 저 쿠폴라를 바라보며 살아왔다. 만날 수 있을까. 아니면……. 두오모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큰 기대와 불안이 번갈아 밀려와 서로를 밀쳐냈다. 매일 이 거리를 걸어갔지만 평소와는 느낌이 달랐다. 기대해서는 안 돼, 하고 나를 향해 말해보았다. 만나지 못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십 년 전, 그것도 몽롱한 약속이었으므로……. 만나지 못한다 해도 나는 최후의 순간까지 쿠폴라 위에서 기다릴 것이다. 기다리면서 팔 년이란 시간을 복원할 것이다. 그리고 아오이가 오지 않아도 나는 무너져버린 나를 스스로의 힘으로 재생시키고 당당히 내려올 것이다. _pp.214~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