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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 다가가는 아주 특별한 방식


사랑에 빠진다 → 이별을 한다 → 아픔을 느낀다.
많은 사람이 겪는 연애의 과정이다.
사랑에 빠진다 → 이별을 한다 → 아픔을 ‘나눈다’.
이것은 소피 칼이 겪은 연애의 과정이다.

『시린 아픔』은 프랑스의 유명 설치미술가이자 사진작가인 소피 칼의 이별 극복기를 담은 사진 수필집이다. 인생에서 겪는 평범하고 사소한 희로애락을 독특한 예술관으로 승화해 다양한 프로젝트를 선보인 소피 칼답게, 이별의 아픔을 극복하는 방식 또한 매우 독특하다. 그녀는 혼자만의 가슴 쓰린 배신감과 아픔을 가슴속에만 품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반복해서 토로한다. 그리고 동시에, 상대에게도 인생에서 가장 아팠던 기억을 들려달라고 한다. 그들의 슬픈 사연을 들으면서 소피 칼은 자신의 아픔을 상대화하며 서서히 고통을 극복해나간다. 이 방식은 상당한 효과를 거둔다. 이별의 아픔과 타인의 아픔을 매일매일 곱씹길 반복하고 약 백 일 정도 만에 소피 칼은 마음의 상처를 완전히 회복한다. 그러나 그 결과물은 기록에만 그쳤다. 간신히 아문 상처가 다시 덧날까 두려웠던 소피 칼은 이 시리고도 아픈 기억들을 서랍 속에 묻어두었고, 그로부터 15년 후 이 책의 출간을 결심했다. 1985년에 시작된 프로젝트가 200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책의 전반부에서는 소피 칼이 여행 중 찍은 사진들이 실려 있다. 이별의 아픔을 겪기 전의 기록들이다. 그 기록은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그리움과 관심, 애정을 담고 있다. 연인에게 보내는 그녀의 편지를 보면 그녀만의 독특한 세계관과 유머러스한 사고방식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나 누구보다 짙은 그녀의 개성도 연인을 향한 애틋한 사랑을 감추지는 못한다. 여행 기간 동안 찍은 사진들에는 매번 ‘D-92’, ‘D-91’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그와 헤어지는 ‘그날’이 오기 전의 카운트다운이다. 독자들은 예정된 아픔의 ‘그날’을 직감하며, 서서히 그녀의 슬픔 속으로 다가간다. 예고된 슬픔이긴 하나, 디데이를 지난 이후의 기록들은 처절하리만치 가슴에 사무친다.

치유의 경험을 선물하는 책

‘5일 전,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날 떠났다.’
이 책의 2막은 이 담백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 문장은 수도 없이 반복된다.
사랑하는 남자의 변심을 알아채고 묵묵히 받아들인 그날, 그녀는 인도의 한 호텔 방에 우두커니 홀로 있었다. 침대 위에는 이별을 통보받은 빨간색 전화기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아름다운 재회를 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호텔 방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이별의 소식을 전해준 빨간색 전화기만 노려보며 밤을 지새운다.

디데이가 시작된 이후의 기록들은 이전보다 조금 더 독특한 방식으로 실린다. 왼쪽 페이지에는 소피 칼이 이별을 알아챈 그날 그 장소, 호텔 방 침대 위 전화기 사진과 함께 자신의 사연이 적혀 있고, 오른쪽 페이지에는 그날 이후 아픔을 함께 나눈 사람들의 가슴 아픈 사연과 그날의 사진들이 실린다. 특이한 점은, 왼쪽 페이지에 반복해서 기록된 소피 칼의 사연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야기의 길이가 점점 더 짧아지고 글씨는 점점 더 흐려진다. 마침내 모든 아픔이 다 극복되고 난 이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반면 오른쪽엔 매 페이지마다 새로운 등장인물의 가슴 시린 사연이 이어진다. 따라서 독자들은 책장을 넘길수록 여러 사람의 다양한 아픔을 새롭게 접하며 소피 칼의 가슴 아픈 기억이 점점 더 퇴색되어감을 느끼게 된다. 공감 능력이 발달한 사람일수록 이 책이 글이 아닌 ‘경험’을 선물하는 책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공감의 체험, 슬픔의 체험, 치유의 체험을 저자 그리고 이름 모를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시린 아픔』은 출간 직후 프랑스에서 ‘책이라기보다 하나의 예술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따라서 국내에서 출간되는 책 또한 원서의 심미성을 해치지 않기 위해 판형이나 내부 구성 컨셉을 그대로 따랐고, 그로써 대중성과 예술성을 고루 갖춘 책이 완성될 수 있었다. 책에 담긴 소피 칼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사연들은 국내외를 통틀어 모든 사람들의 공감을 살 수 있다는 점에서 대중적이고, 이 대중성은 소피 칼만이 구현할 수 있는 독특하고 감각적인 예술성을 갖춘 그릇 안에 오롯이 담겼다. 가슴 시린 사랑을 해본 사람들, 과거의 사랑을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누구에게도 말 못할 고통을 홀로 쓸쓸히 감내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 추천평

“가슴 시린 아픔으로 남몰래 눈물을 훔치고 있을 사람들에게, 가슴 한편에 지울 수 없는 고통의 조각을 품고 있을 사람들에게, 이 책이 아픔의 순간을 함께 공유하는 존재가 되길 바란다.”
_옮긴이 배영란

“사람들이 왜 그렇게 이 책을 추천하는지 알 것 같다. 나 역시 이 책을 받자마자 순식간에 독파해버렸다. 책의 형태 자체도 상당히 아름답다. 디자인도 독창적이고, 책 속에는 소피 칼의 사진도 많을 뿐 아니라 그 안의 내용 역시 문학적 가치가 충분한 글들이다.”

“소피 칼은 가로 10cm, 세로 19cm의 판형으로 책을 만들었다. 일반적인 크기의 앨범 판형으로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이렇게 작은 사이즈의 판형을 선택함으로써 책의 내면적 분위기를 살렸다. 표지는 깔끔하면서도 투박하다. 독자들은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부터 계속 놀라움을 맛보게 될 것이다.”
_프랑스 독자 서평



▮ 책 속으로


D-6
그날 입고 갈 옷을 고르러 야마모토 매장에 갔어. 옷을 입어보는 데만도 몇 시간이 걸렸네. 결국 비단 천으로 된 검은색 바지 하나와 상의 두 벌을 샀어. 함께 겹쳐 입을 요량으로 하나는 회색, 하나는 파란색으로 골랐지. 모든 게 완벽하길 바라. 가는 도중에 옷이 구겨지지 않으면 좋겠고, 인도의 분위기에도 잘 어울리면 좋겠어. 아울러 공항에서의 재회라는 상황에도 잘 맞는 옷이길 바랐지. 우아하면서도 지나치게 장식이 들어가지 않은, 그렇게 꾸미지 않은 듯 예쁜 옷을 찾았던 거야. 이 옷은 내가 하나도 변한 게 없다는 느낌을 주면서도, 어딘가 미묘하게 달라진 느낌을 줘야 해. 내가 어느 정도로 당신을 그리워했는지 보여주면서도, 그렇다고 내가 당신 없이 못 사는 건 아니라는 느낌도 줘야 하지. 당신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내가 빛나고 성숙해졌다는 느낌을 줘야 해. 당신도 내가 다시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느끼게 만들어야 해. 첫 느낌이 결정적인 거니까. _p.186

D-194
이제 단 하루밖에 남지 않았어. 이렇게 행복한 적은 없었어.
당신이 날 기다려줬어. _p.194

7일 전,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날 떠났다.
그는 내 아버지의 친구였다. 어릴 때부터 이미 나는 그에게 완전히 반해 있었으나, 내 나이 서른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따금씩 그는 내게 자신이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일깨워주었고, 나는 이러한 경고를 비웃었다. 그는 내 곁에 있었으니까. (…) 전화로 두서없이 몇 마디가 오고 간 끝에, 얼마 전 그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사실과, 그가 그 여자와의 진지한 만남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수화기를 내려놓기 전, 나는 이렇게 속삭였다. “내가 운이 없군.” 그날 밤 내내 나는 임페리얼 호텔 261호에서 좀먹은 카펫과 빨간색 전화기를 응시하며 밤을 지새웠다. 인도에서 보자고 한 건 그의 생각이었다. 호텔 방을 예약한 것도 바로 그였다. 내 고통의 무대가 될 곳을 선택한 것도 바로 그였다. _p.208

페르피냥에서였다. 1971년 5월의 어느 토요일, 오후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나는 기숙학교에서 지내다 집으로 돌아왔고, 우리 집 아래에는 전기공이 살고 있었다. 그는 나를 기다렸다. 나에게 모든 소식을 전할 역할을 그가 맡은 것이었다. 그가 나를 자신의 작업장으로 불러들이고는 의자 위에 앉혔다. 그 사람 말에 따르면, 형이 아침에 사고를 겪었다고 했다. 트럭 문짝이 형의 가슴팍을 들이받았는데 거의 마비 상태라고. 나로서는 희소식이었다. 내게 유일하게 걸림돌이 되는 존재가 바로 형이었기 때문이다. 형의 이름은 베르나르였고, 나이는 스무 살이었으며, 당시 나는 열여섯이었다. 사고 위험이 워낙 많은 곳이었다고, 형은 이제 막 비좁은 통로를 빠져나오던 참이었다고 전기공은 횡설수설 말을 이어갔고, 그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나는 줄곧 최악의 상황을 기대했다. 앞으로는 형을 내 수중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내가 갖고 싶은 것도 모두 마음대로 가질 수 있을 터였다. 전기공은 휠체어 위에서의 삶에 대해 한 시간 동안 정신없이 얘기한 뒤, 갑자기 이렇게 끝마무리를 했다. “아니, 실은 거짓말이야. 자네 형은 죽었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올라갔다. 어머니께서는 울부짖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어. 하나밖에 없는 내 아들을…….” _p.249

1983년 8월 8일 오후 4시 30분, 그가 내게 말했다.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프랑스 남부, 초원 쪽으로 난 방에서 이 얘기를 들었다. 이 일이 아마 내 인생 최대의 고통은 아닐 것이다. 다만 가장 최근에 겪은 일이고, 단언컨대 그래서 가장 세세하게 떠오르며,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고통의 기억이다. _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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